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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실

제주도

 

제1장  제주의 역사와 문화

1. 위치 : 동경 126도 30분 북위 33도

2. 면적 및 거리 : ㄱ. ①한반도의 서남부 목포로부터 남쪽으로 91마일

                      ②부산과의 거리는 168마일

                      ③일본 대마도와의 거리는 150마일

                  ㄴ. ①섬 주위 길이가 254km

                      ②면적은 1825㎢ (거제도의 5배)

                      ③동서의 길이는 80㎢, 남북의 길이는 40㎢

3. 형성된 역사 : 빙하시대로부터 시작하여 4~5만 년 전 한반도와 연결된 땅이었다. 그러던 중 지각변동이 되면서 제주도는 섬이 되었다.

4. 한라산 식생 : 온대, 열대, 한 대 식물 1천 8백여 종 서식

5. 제주 돌을 이용 밭의 경계선을 만든 판관 김구 →제주도는 한라산의 화산암이 터져 이루어 졌기 때문에 돌이 많아 가는 곳마다 돌밭이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데도 고생이 많았다.

※ 고려시대 고종은 탐라를 제주라 고치면서 김구를 제주 판관으로 임명

⇒김구는 제주로 부임하자마자 제주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관찰하던 중 농민들이 곡식을 수탈 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력이 강한 부호들이 땅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힘없는 농민들의 땅을 차지하고 이를 수탈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밭이나 논에 경계가 없었다.

  판관 김구는 논밭의 경계가 없어 가난한 농민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고 농민 서로간의 땅 다툼도 생기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를 하다가 돌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땅 경계선을 만들라고 명을 내리니 각각 자기 땅마다 돌로 경계가 되어 싸움도 없어지고 농민들의 억울함도 없어지고 좋은 점이 많았다.


※돌의 이용 효과

  ①바람을 막아 농작물을 보존하는 역할

  ②소나 말들의 침입을 막아주어 농작물의 피해를 줄임.

  ③돌밭인 밭에 돌을 치우고 나니 경지면적지도 넓어지고 농사일도 편해지면서 수확량이 많아짐.

6. 조상을 모시는 장례제도를 만든 목사 기건

→세종 25년 12월 제주도 목사로 부임(2년 동안 재직)

⇒당시 제주도는 장례제도가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관도 없이 시체를 산 속이나 개천에 버렸다. 이에 이건 목사는 장례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하였다. 이 제도의 시행이후 당시 자손이 없어 걱정하던 집안에 손자 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하여 후손이 대대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우리 혼을 달래주신 은혜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목사님 자손들을 번창하도록 하겠습니다.)→이 내용은 기건 목사 꿈에 300여 귀신들이 동헌 뜰에 엎드려 있었다가 한 말이라고 한다.

7. 미신 타파와 민생교화에 힘쓴 목사 이형상

→숙종 27년 11월 목사로 부임하여 29년 3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재직

①세금이 지나치고 부담이 크다하여 상소를 올려 세금을 감면함

②도민들이 미신에 빠져 있는 걸보고 미신타파를 위해 129개의 음사(당)신당을 소탕하고 미신사찰 5개소를 헐어버리고 건전한 정신을 심는데 앞장섰다. 그래서 현재 지역별로 당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름이 있는데 그때 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③향교를 세워 지방 자체 교육에 힘쓰며 삼성사를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④해녀들의 수중 작업복도 고안하여 장려하였다.

8. 조정철

→순조 11년 제주목사로 부임

→감귤과수원을 만들어 감귤재배를 권장

9. 화순천 냇물로 논밭을 만든 김광종

→화순천 물을 끌어들이는 일은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로는 양쪽에 솟아 있는 암돌벽이요. 둘째로는 물을 당기면 모두 지하수로 스며버려 물을 이용하여 논밭을 만들기란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로를 다시 수정하고 몇 번이나 시험을 거친 끝에 10년이 지난 헌종 7년(1841년) 수로공사를 마무리지어 1만여 평의 기름진 논밭을 만들었다.

10. 산담과 시문(시문:기일이나 명절 때 넘나드는 출입문)

→남자는 정면을 보았을 때 왼쪽, 여자는 정면을 보았을 때 오른쪽(남좌여우)

※산담9제주방언으로 묘소 울타리를 하는 이유

⇒소나 말들의 출입을 막아서 훼손을 방지

⇒산불에 따른 방화 방지

⇒  제주 사람들은 죽음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죽어도 이웃과 사이좋게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 증거가 산담 이다. 무덤만 덩그러니 만들어 놓지 않고 무덤이 망자의 집이라면 집 울타리 역할을 하는 산담이 에워싸고 있다. 형태로는 장방형이다. 간혹 타원형을 볼 수가 있는데 장사 치르는 당일에 쌓은 담으로 한 겹이며 외담 형식이다. 특이한 것은 시문이라는 신의 출입문이 만들어져 있다.(현재는 모퉁이에 따로 돌을 놓는다.)

  제삿날 자손들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기 위해 후손의 집을 찾아 올 때 출입하는 문이다.

@ 망자가 남자면 오른쪽에 여자면 왼쪽에 만든다. 산담은 영혼의 영역을 나타내는 일종의 경계구실을 하며 소나 말의 침입을 막아주며 화입이라 하여 들불을 붙일 때 산불이 무덤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호벽 역할도 하며 높이와 넓이는 대략 1M내외로 한다.

@동자석 : 심부름 역할

산을 지키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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